<친일파는 살아 있다> '황군' 양성 만주군관학교 졸업생
‘만주군관학교’란 만주국이 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사관학교를 말한다. 일본 관동군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령한 뒤 이듬해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의 경우 조선이나 대만처럼 총독을 파견하지 않고 중국인으로 ‘얼굴마담’을 내세웠다. 청조(淸朝)의 폐제(廢帝)인 선통제(宣統帝), 즉 푸이(溥儀)를 집정(執政)이라는 자리에 앉히고는 관동군 사령관이 실권을 행사했다. 수도는 신경(新京, 현 장춘), 연호는 대동(大同)으로 정했다. 신경군관학교 생도들의 야외전투 훈련장면 (출처 : <동덕대>) 만주군관학교 휘장. 가운데 5색 별은 '5족'을, 둘레의 노란색 곡식은 만주의 주곡인 '조'를 상징한다. 이 컵은 7기생 김광식 씨가 1997년 필자에게 선물한 것임.
만주국이 처음 세운 사관학교는 1932년 옛 수도인 봉천(奉天, 현 심양)에 세운 2년제 ‘중앙육군훈련처’로 흔히 봉천군관학교라고 부른다. 관동군은 만주를 점령한 후 군벌 장작림이 설립한 목단(심양의 옛 이름)의 군관학교를 접수하여 6개월 과정의 장기 장교훈련과정을 개설했다. 시험과목은 수학, 물리, 화학, 지리, 역사, 작문, 일본어 등이었으며, 시험은 각 군관구 사령부 소재지에서 실시하였다.
첫 3개 학년이 수료한 1년 반 이후에는 2년제 과정으로 개편되었다. 이는 도쿄에 있는 일반참모학교를 모방한 것으로 기본훈련 4개월, 정규수업 14개월, 현장실습훈련 6개월의 교육과정을 두고 있었다. 졸업시험에 합격하면 2~3개월간 상사 계급을 달고 견습사관을 한 후 소위로 임관되었다. 조선인은 4기생부터 입교할 수 있었는데, 1939년 만계(滿系) 군관후보 9기, 일계(日系) 군관후보 11기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봉천군관학교 출신(군수학교 졸업생 포함) 조선인으로는 3기 김정호 1명, 4기 강재호·김응조 등 7명, 5기 정일권·김백일·김석범·김일환·신현준 등 18명, 6기 양국진·최남근·박승환 등 7명, 7기 최철근 1명, 8기 석주암 등 3명, 9기 백선엽·윤수현 등 2명으로 총 39명 정도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대륙침략을 본격 개시한 일본 육군은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장교 양성을 위해 1939년 만주국에 4년제 정식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정식명칭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로 흔히 신경군관학교라고도 불린다. (신경 교외 라라툰(拉拉屯) 지역에 위치한 옛 신경군관학교 시설은 현재 중국인민해방군 장갑병기술학교로 사용되고 있다) 1939년 4월 만계(滿系) 1기생 90명이 입교하였고 이듬해 일계(日系) 학생 172명이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개교식은 일계 2기생이 입교한 1941년 6월 20일 거행됐다.
예과에서는 학과 위주 교육을, 본과에서는 전술 위주의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교육내용과 복지 등에서 민족간에 차별대우가 있었다. 조선인은 초기에는 만계로 입학했으나 1943년 5기생부터는 일계로 편입되었는데 졸업 후 일본군 예비역 소위 편입과 동시에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1945년 8월 일제 패망 때까지 만계 7기, 일계 6기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임관은 3기생까지였다. 일계 생도 가운데는 일본인 외에 일본의 식민지 조선과 대만 출신도 포함돼 있었다.
신경군관학교(경리학교 출신 등 포함) 출신으로는 1기생은 김동하(해병 중장)·윤태일(육군 중장·국회의원)·방원철(육군 대령)·이기건(육군 중장) 등 13명, 2기생은 박정희(육군 대장·대통령)·이한림(육군 중장·건설부장관), 김재풍 등 11명, 3기생은 최주종(육군 소장·주공 사장)·강태민 등 2명, 4기생은 예관수·장은산 등 2명, 5기생은 강문봉(육군 중장·국회의원)·황택림 등 5명, 6기생은 김동훈·육굉수·김윤근(해병 중장, 호남비료 사장)·김학림 등 11명, 마지막 기수인 7기생은 김광식(여주대 학장) 등 4명으로 전체 졸업생 수는 48명이다.
만주군관학교 출신들 가운데는 지리적인 요인으로 인해 북한지역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은 창군 초기 군부 내에서 ‘만주파’로 불리며 세력집단을 형성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정일권은 함경도파, 백선엽은 평안도파의 우두머리로 불렸다. 신경2기 출신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김동하·박임항·윤태일·김윤근 등 신경 출신 선후배들이 이에 적극 가담하여 도왔다. 그러나 나중에 이들은 박 정권에 부담으로 작용해 이른바 ‘반(反)혁명사건’으로 몰려 권력에서 제거됐는데 흔히 이를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라고 부른다.
한편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친일파로 볼 것인지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우선 당시 일본군(만주군 포함) 장교의 위상과 역할, 그리고 만주군관학교 입교자들의 성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군국주의 시대는 군인이 통치권력의 주체로 활동하던 시기로 일본 정부의 내각이나 조선·대만 총독 역시 전부 전·현직 군 장성들이었다. 당시 일본 군대는 국가안보를 담당하는 정부조직 차원을 넘어 사회전반을 지배하는 최상층의 권력집단이었다. 따라서 이같은 군국주의 체제하에서 장교의 위상은 평시의 ‘직업군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군관학교는 바로 그런 장교를 양성하는 국가기관이었다.
군관학교 입교자 가운데는 다양한 입학 동기를 갖고 있었다. 장교가 되기 위해 뚜렷한 목표의식과 투철한 시국관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중·고등학교 졸업 후 상급학교 진학 차원에서 군관학교를 택해 지원한 사람도 있었다. 또 주변의 권유나 심지어 장교 계급장을 단 제복차림에 반해 군관학교를 입교한 사람도 있었다. 따라서 모든 군관학교 입교생들이 ‘황군(皇軍)’이 되기 위해 입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당시 일본군 장교의 임무가 무엇이었으며, 또 당시 우리민족이 처한 상황이 어떠했는지도 알고 있었다고 본다면 이들의 일본군 복무 전력을 변호할 명분은 그리 많지 않다. 결국 자원해서 군관학교에 입교했고, 또 졸업 후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전력자라면 그들을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보는 데는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일본군 장교 출신들을 다루지 못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런 일인데 이는 전적으로 시대적 여건 때문이었다. 건국 초기 군부는 신성불가침 지대나 마찬가지였으며 그 당시 일본군 출신들은 ‘창군의 주역’으로 이미 한국군의 상층부를 점령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 설사 대상자가 있었다고 해도 반민특위에서 그들을 체포, 소환해서 조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 출신들은 본의 아니게 반민법정에서 면죄부를 받은 셈이 됐다.
다만 2005년에 제정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항(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서는 일본군 소위 이상의 장교 출신자들을 조사대상자로 규정했다. 물론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라는 단서조항은 있다. 참고로 <친일인명사전>의 경우 하사관까지도 대상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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