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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선 꼭 좋은성적을....

고동소라 2012. 1. 6. 17:30

<오랜만입니다>강초현 “‘아직 사격하냐고?’… 내 과녁은 오직 한 점, 런던올림픽”

시드니올림픽 0.2점차 銀 사격선수

과거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흘러가 버린 영광 안에서 사는 그런 선수. 강초현(30·갤러리아)에게 덧씌워진 이미지다. 스포츠계에는 과거 빛났던 순간에 머물러 사는 사람이 적지 않다. 과거가 찬연할수록 벗어나기도 어렵다. 강초현의 2000년 여름은 뜨겁고 강렬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18세 소녀는 세계 정상 일보 앞까지 갔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승부가 뒤집혀 올림픽 은메달에 머물렀다. 결과를 확인한 후 고개를 뒤로 젖혀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당연했다. 손 안에 있던 고기를 놓친 심정이었을 게다. 거기까지라면 여느 은메달리스트들처럼 쉽게 잊혔을 터다. 반전이 일어났다. 시상대에 선 강초현은 밝게 웃었다. 금메달리스트보다 더 화사했다. 희고 작은 얼굴에 초승달 눈과 활짝 드러나는 이가 어우러진 '강초현표 미소'였다.

↑ 강초현이 대전 유성구 상대동 유성중학교 사격장에서 훈련을 하던 도중 런던올림픽 도전에 대해 말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대전 =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를 심각한 사랑에 빠져들게 했던 로테의 미소가 그랬을까. 한국 국민들은 강초현의 매력을 곧바로 발견했다. 시드니올림픽에서 돌아온 강초현은 이미 스타였다.

그러나 '스타' 강초현의 절정기는 길지 않았다. 2001년 갤러리아 사격단에 입단한 뒤로는 외부 활동 자체가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다. 시드니올림픽 이후 두 차례의 올림픽에서는 태극마크를 달지도 못했다. 그러는 사이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동계훈련 중인 강초현을 3일 오후 대전 유성구 상대동 유성중학교 사격장에서 만났다. 3월에 있을 2012 런던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하루 6시간의 훈련을 소화하고 있다고 했다. '강초현표 미소'는 여전했다. 사진 촬영용 표정은 아니었다. 대화하는 내내 웃음과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사격과 첫 만남이 궁금했다. 감독의 눈에 띄어 운동할 체격(키 157㎝, 몸무게 45㎏)은 아니었다. "한 백만 번째 듣는 질문"이라며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을 이었다.

"진학한 중학교(대전 유성여중)에 사격부가 있었어요. 호기심에 보다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사격이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종목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직접 하겠다고 찾아갔죠."

당시 학교에서 사격부원 선발을 담당한 선생님이 강초현의 먼 친척이었다. 친척이었던 선생님은 "운동은 잘해도 본전"이라며 사격부 가입을 반대했다. 학교 성적도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강초현의 뜻이 강했다. 당시 사격부에 들어가려는 학생이 많아 테스트를 거쳐 선발됐다. 약 스무 명이 사격을 해서 그 중 서너 명이 뽑혔는데 그 안에 들었다. 재능은 있었던 셈이다.

본격적으로 사격을 시작한 강초현은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을 올렸다. 봉황기 같은 메이저급 국내 대회에서 메달을 따기도 했다. 그러나 태극마크를 달 실력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국가대표는 물론이고 상비군도 해보지 못했다. 유성여고 1학년에서 2학년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슬럼프도 왔다. 시드니올림픽이 열린 2000년이 됐지만 강초현은 국가대표 선발전에도 나갈 자격이 안됐다. 그때 중요한 제안을 받았다.

"중학교 때 사격부 선발을 담당하셨던 은사님이자 친척 오빠가 무슨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자비로 국제대회에 참가해서 '올림픽 출전 최소자격점수(MQS)'를 따자고 하셨어요. MQS를 확보하면 선발전에 나갈 수 있거든요. 하지만 전 뜨악했죠. 아버지가 막 돌아가셔서 집안 형편이 어려웠으니까요. 친척분들이 도와줘서 다녀왔는데 결과적으로 아주 잘 됐어요."

그렇게 어렵게 나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강초현은 덜컥 2등을 차지했다. 이변이었다. 여고생 국가대표는 이전에도 여럿 있었지만 강초현처럼 상비군 경험조차도 없는 선수가 대표선수로 뽑힌 적은 없었다. 대한사격연맹은 고심했다.

"연맹에서도 의견이 분분해서 회의가 열렸을 정도였어요. 처음에는 사실 기분이 나빴지만 결과적으로는 득이 된 것 같아요. (주변에서 워낙 기대를 안 했으니까) 올림픽에서 부담 없이 시합을 했습니다."

스포츠는 몸으로 하지만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 기량이 비슷하다면 마음의 조화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선수가 부담을 털어 내면 담대해진다. 부담이 없는 강초현은 무서웠다. 시드니올림픽 여자 10m 공기소총 예선에서 단독 1위가 됐다. 2위와 꽤 큰 격차가 있었다. 결선에서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금메달이 무난했다. 금메달이 눈앞에 아른거리자 그토록 담대하던 강초현은 갑자기 흔들렸다. 결선에서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며 아홉 발째 미국의 낸시 존슨에게 동점을 허용했다. 이제 남은 한 발로 메달의 색깔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사격할 때 선수들은 의식적으로 뒤를 보지 않아요. 등수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면 심리적으로 흔들릴 수 있으니까요. (시드니올림픽에서) 마지막 발을 쏠 때는 제 생애에서 다시는 경험 못 할 정도의 긴장감 속에서 사격을 했어요. 도망가고 싶은, 벗어나고 싶은 긴장감이 어떤 건지 그때 느꼈어요. 마지막 발을 쏘고 난 후에 뒤에 앉아 있던 감독님이 손가락으로 2등이라고 알려줬어요. 그때 고개를 젖힌 건 2등이라 아쉽기도 했지만 '이제 끝났구나'하는 허탈감도 있었던 것 같아요."

은메달이 결정되고 나서 강초현은 눈물을 보였다. 당시는 성적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강초현은 당시 경기장 분위기를 큰 요인으로 지목했다.

"사실은 그 때 기자분들이 자꾸 카메라를 들이대니까 분위기가…이게 좀 울어야 하나. 너무나 확실한 금메달 후보로 결선에 올라가서 당시 문화체육부 장관도 왔었고, 기자들도 굉장히 많이 왔었거든요. 그런 분위기가 있어서 울어야 하나 했죠. 물론 아쉬움도 있었고요(웃음)."

강초현이 은메달을 땄을 때 1등과 차이는 0.2점에 불과했다. 실제 사격에서 0.2점이면 얇은 펜으로 찍은 작은 점 크기의 차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지만 시상대에 올라선 강초현은 모든 아쉬움을 털고 환하게 웃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의 어려움을 씻어준 미소'라고 극찬했다. 강초현은 "은메달 따면 죄인처럼 하는 분위기가 싫었다. 스스로 대견하고 자랑스러웠기 때문에 그렇게 웃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시드니올림픽을 마치고 돌아온 강초현은 '국민 여동생'이 돼 있었다. 금메달리스트보다 은메달리스트 강초현이 더 사람들 마음을 붙잡았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알아봤고, TV·신문에서 서로 모셔가기 바빴다.

"길게 잡아야 올림픽 준비할 때부터 5개월 안에 일어난 변화였기 때문에 그냥 어리벙벙했어요. TV에서 보던 스타들이 저를 알아보는 것 자체가 신기했어요. 내가 뭐가 좋아서 사람들이 저럴까 궁금하기도 했고요."

강초현은 갤러리아 사격단 입단 후에 언론 접촉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운동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후 두 번의 올림픽 선발전에서 모두 탈락했다. 2003년과 2006년에 국가대표로 선발이 됐지만 올림픽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이제는 만나는 사람마다 "아직도 사격하나"고 물어볼 정도로 잊힌 존재가 되고 있다.

스포츠계의 '국민 여동생' 계보는 김연아(22·고려대)를 거쳐 현재는 손연재(18·세종고)가 잇고 있다. 강초현은 대학 후배(고려대 체육교육과)이기도 한 김연아에 대해 "굉장히 팬"이라며 특별한 감정을 드러냈다.

"김연아 선수의 경기는 기다렸다가 볼 정도로 좋아해요. 밴쿠버올림픽 때는 인터넷으로 유럽 각국 버전으로 된 김연아 선수 경기를 찾아보기도 했고요. 굉장히 팬이고 응원 많이 했어요. 피겨스케이팅은 아름다운 종목이면서도 무척 힘든 종목이라고 생각해요. (김연아는) 학교 후배인데 스포츠 쪽에 있다면 언젠가 한 번 마주치지 않을까 생각해요."

손연재에 대해서는 가능성에 주목했다.

"손연재 선수는 귀여워요. 앞으로 저도 저고, 김연아 선수보다도 더 가능성이 있을 나이예요. 더 잘할 수 있으니까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가 돼요. 이번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 거뒀으면 좋겠어요."

'국민 여동생' 자리는 오래전 내놨지만 방아쇠는 여전히 손에 쥐고 있다. 과거의 환영(幻影)을 좇아서가 아니다. 여전히 가슴이 뛸 정도로 사격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갖더라도 사격과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학교 다닐 때부터 15년 이상 사격을 해왔지만 아직도 사선에 설 때마다 매력을 느끼고 가슴이 뛰는 것을 느껴요. 사격이 즐겁고 재밌어요. 그게 아니었다면 전에 있던 명예마저 떨어지는 걸 감수하면서 계속 사선에 설 수 없었을 거예요."

지금 강초현의 시야에는 런던올림픽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은퇴시기, 결혼 등등 어떤 질문을 던져봐도 "지금은 런던올림픽 이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답만 돌아온다. 강초현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날을 잔뜩 벼린 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초현은 올림픽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바뀌었다는 말을 했다.

"지난 두 번의 올림픽에서 저는 두려워했고 부담스러워했어요. 그래서 피하려고 했고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나 갈 거야. 나 런던 가니까 티켓 사놔'라고 친구들에게도 얘기하고요. 예전에 '열심히 해서 되면 되는 거'라는 마인드였다면 지금은 '나 갈거니까' 하는 마인드예요."

사격선수로서 스스로에게 점수를 매겨달라는 부탁을 했다. "어려운 질문"이라며 머뭇거리던 강초현은 어렵게 입을 뗐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열심히 하지 않는 선수는 없다는 거예요. 누구나 열심히 하지만 결과를 보여주지 못하면 처지고 잊히죠. 그런 부분에 중점을 둬서 생각한다면 저는 50점도 안 되는 선수죠."

박한 점수다. 결과로 보면, 남들의 평가에 따르면 그 정도밖에 줄 수 없다는 설명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사격선수 강초현'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었다. 그랬더니 또 잠시 생각한 후에 "후하게 줘서 한 70점"이라고 말했다.

강초현의 미니홈피를 보면 한 영화의 장면을 갈무리해 올려놓은 사진이 있다. 거기 나온 대사는 다음과 같다. '실패자가 뭔지 아니? / 진짜 실패자는 지는 게 두려워서 도전조차 안 하는 사람이야 / 넌 지금 도전 중이잖니.' 강초현은 국가대표에 재도전하면서 이 말을 마음에 떠올린다고 했다. "결과로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계속 도전했고 노력했다는 게 언젠가는 알려질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강초현은 여전히 도전한다. 미래를 향해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